뭘 그렇게 일을 못 줄이느냐 싶으실 수도 있는데요, 저 혼자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서 몇 가지를 찾아봤습니다.
시간이 비면 다른 일이 더 생깁니다
제 경우를 순서대로 적어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원래 하던 일이 더 짧은 시간에 끝납니다. 그러면서 어디까지 맡길 수 있는지 감이 잡힙니다. 이건 맡겨도 되겠다, 저건 아직 아니다, 이건 시켜 놓고 그동안 다른 일을 봐도 되겠다. 이런 식으로 AI와 협업하는 방식의 기준이 생기죠.
문제는 그 기준이 생기고 나서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미뤄 뒀던 일과, 어차피 못 할 것 같아서 처음부터 계획에서 빼 놨던 일이 다시 후보로 올라옵니다.
이 블로그를 영문과 한글, 두 버전으로 쓰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가 되겠네요. 예전에는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사치였습니다. 지금은 초안을 잡고 말투를 다듬다 보면 제가 하려던 말이 거의 정리되니 훨씬 수월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일이 다시 추가되다 보면 결국 일의 총량은 늘어나 있고, 저는 다시 여유가 사라져 있습니다.
이게 순전히 제 욕심이라면 그냥 안 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주변이 같이 빨라지고 산출량이 많아지면, 저 또한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Stripe의 스태프 엔지니어 Ricardo Bedin은 지난 8월에 쓴 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AI somehow made things easier and raised expectations at the same time. There are fewer and fewer excuses to justify you not being able to land a project on time, or generating the impact you promised.
Ricardo Bedin, Being a Staff Engineer at Stripe in 2026
일이 쉬워진 것과 기대치가 올라간 것이 같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 업무의 상당 부분이 여러 환경에 흩어져 돌아가는 여러 개의 에이전트를 관리하는 일이 되었다고도 적었습니다. 만드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사람을 관리하듯 AI의 업무를 관리하는 범위까지 넓어진 겁니다.
실제 숫자로도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보입니다
Linear가 공개한 고객사 데이터를 보면, 2026년 6월을 기준으로 유료 워크스페이스당 주간 PR 수가 2024년 6월 기준선 대비 111퍼센트 늘었습니다.
그러면 정리하고 검토하는 시간은 줄었을까요? 엔지니어링 직군 기준으로 2025년 6월과 2026년 6월을 비교하면, 이슈를 만들고 분류하는 데 쓴 시간이 월 24분에서 28분으로 늘었습니다. 댓글에 쓴 시간은 35분에서 40분으로 늘었고요. 창업자 직군은 폭이 더 큽니다. 40분에서 57분, 39분에서 64분입니다.
만드는 속도가 두 배가 되었는데 정리하는 시간은 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씩 늘었습니다.
다만 이 숫자를 근거로 쓰기 전에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Linear가 같은 페이지에 스스로 달아 둔 단서입니다.
We have no way of knowing whether this increased output led to positive business outcomes. We count PRs opened rather than merged, and an opened PR says nothing about the value of the change. What we can't see is AI usage that happens outside Linear, so this is a picture of adoption inside our own customer base, not the market at large.
Linear, AI Usage Report
저도 PR 숫자만 놓고 무언가를 넘겨짚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숫자를 두고 도는 농담이 많다는 것 자체가 눈에 띕니다. 특히 10줄짜리 PR에는 지적이 열 개 달리는데 500줄짜리에는 LGTM이 달린다는 오래된 농담을 떠올려 보면, PR 수가 늘었다는 사실 하나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만들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한 번에 그냥 넘어가는 덩어리가 커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바쁨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정작 달라졌다고 느끼는 지점은 업무량이 늘었다는 쪽이 아닙니다.
예전에 누군가 바쁘다고 하면 그건 일이 많다는 뜻이었습니다. 본인에게 주어진 일, 주로 서로 연관성이 높은 task가 여러 개 쌓여 있거나, 아니면 하나가 워낙 커서 오래 붙잡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경우였죠.
지금의 바쁨은 task가 여러 개인 바쁨이 아니라, 그보다 위에 있는 objective 여러 개를 동시에 봐야 하는 바쁨입니다. 오전에는 카드 게임의 밸런스를 보고, 점심 지나서는 사이트를 고치고, 저녁에는 다음 빌드에 들어갈 텍스트를 봅니다. 각각 머릿속에 다시 올려야 하는 배경이 전부 다릅니다.
그래서 피로의 성질도 달라졌습니다. 오래 앉아 있어서 지치는 게 아니라 전환이 잦아서 지칩니다. 하루가 끝나고 뭘 했는지 세어 보면 분명히 많이 했는데, 어느 하나도 깊이 들어가지 못한 날이 늘었습니다. 이게 좋은 변화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늘어난 것은 누가 보게 될까요
결과물이 늘면 검토도 같이 늘어야 합니다. 그런데 검토는 자동으로 늘지 않습니다.
자동화 설비를 들여놓은 공장을 생각해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라인에 서 있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검사대와 기록을 맡는 자리는 오히려 늘어납니다. 그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두지 않으면 그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원래 정리하는 습관이 있던 사람에게 조용히 넘어갑니다.
네 명이 만드는 팀에서는 이게 금방 드러납니다. 늘어난 것을 누가 보는지 정해 두지 않으면 그건 곧 한 사람의 문제가 됩니다. 저희도 아직 제대로 정해 두지는 못했습니다. 우선은 각자 자기가 맡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서로의 것을 잘 피드백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대체된다기보다, 볼 사람이 더 필요해집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한때는 AI가 발달하면 사람이 대체된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겪은 쪽은 조금 다릅니다.
하는 일이 바뀌고, 미뤄 뒀던 일을 하게 되면서, 사람이 없어졌다기보다 일이 늘었습니다. 미뤄 뒀던 일과 애초에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함께 늘어났고, 그 일을 실제로 처리하는 AI를 관리하고 감독할 사람은 계속 필요해집니다.
그렇게 산출물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이 과도기가 끝났을 때 우리는 조금 더 발전해 있고 산출물도 더 많은 사회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쪽으로는 낙관적인 편입니다.
물론 크게 바뀌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얼마나 민첩하게 변화에 대응하는지, 새로운 기술과 환경과 문제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 민첩성이 인재의 핵심 역량이 될 것 같습니다. agility가 사람을 판단하는 키포인트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시기에 따라 그 개념이 조금씩 달라지고 더 또렷해지는 중이라고 봅니다.
아직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앞서 인용한 Bedin의 글은 이렇게 끝납니다.
It's one of those unique moments in time where there's a breakthrough happening, and no one really understands the best way to go about it.
Ricardo Bedin
저도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앞으로 충분히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런 기대만으로 AI를 들이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업무까지 확장될 것인지를 먼저 그려 보고, 확장된 업무를 누가 관리하고 검토할 것인지를 함께 정해야 합니다. AI 워크플로가 만들어 낼 여파를 사전에 검토하고, 거기에 맞는 업무 재편과 조직 개편까지 염두에 두고 들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Linear 수치는 2026년 8월 24일에 linear.app/data 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Stripe 글은 Ricardo Bedin이 2026년 8월 12일에 쓴 것으로, 원문을 읽고 인용했습니다. 두 곳 모두 자기 데이터의 한계를 스스로 밝혀 두었고, 이 글은 그 단서를 지운 채로 인용하지 않았습니다.